제목  7년 간의 일기(?) <-- 나의 인생 이야기  (1/2)

첫 경험(?)입니다.

아래 글은 제가 사회 생황을 하면서 촤근까지 7년간의 삶을 소설 형식을 빌려 정리해본 것입니다. 그 안에는 직장 생활/창업/재테크/가정 생활등

살아가면서 누구나 부딪히게 되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제 글을 통해 나의 남편,친구,형제들을 만나실 수 있으며,특히 사회 생활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사회 현실을 직시해 보실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삶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본 사람만이 안다"는 말이있죠." 모든 것이 불안정한 대한 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러하겠죠.

 

온 세상이 다 돈,돈,돈입니다. 모두 내가 옳다.최고다 하고 있습니다.

"날좀 보소. 날좀보소"하는 휴대폰 메세지처럼 말이죠.

옥석을 가릴줄 아는 암목을 회원 여러분들이 가지시길 바랍니다.

 

원래 목적은 친구들을 위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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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When I was young

 

구성 : 1 부/ 2 부

 

(1 부)

 

1. 좌석 버스 데드라인

(1999년 봄)

 

2. 조직 생활

 

- 신입 사원

- 변경된 계획

- 마이 홈(My Home)

- 퇴직

 

3. 3년 후

 

- 창업

- 이사

- 수도승

- 자본주의

 

4. 현재

 

- 가치관

 

 

1. 좌석 버스 데드라인(Dead Line)

 

1999년 5월 20일 목요일

 

나는 오늘도 용인행 5000번 좌석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간은 밤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게에서 양재 역까지 꼬박1시간 20분이 걸린 셈이었다. 나는 피곤했다. 하루종일 손님을 상대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대다가 통근 시간이 왕복 3~4시간이 걸리니 천하 장사라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막차 전의 버스에 올랐지만 오늘도 나는 서서 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양재역은 용인 지역에 있는 여러 대학의 학생들로 늘 붐비는 대다가 밤 늦은 시간에는 직장인까지 가세해서 콩나물 시루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창 밖을 보니 버스는 어느새 용인 수지 지구를 지나고 있다. 이곳은 내가 가게를 하기 전까지 2년 넘게 살던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신갈로 이사를 간 것은 가게를 시작하면서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살던 집을 전세주고 작고 먼 집으로 옮긴 때문이었다. 다행히 구성을 지나니 자리가 나서 자리에 앉았는데 쏟아지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버스에서 내려 집에 도착하니 아내와 해람이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씻고 난 뒤 아내 옆에 조용히 누웠다. 지금 시간이 새벽 1시 30분.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피로가 온몸을 엄습해 왔지만 나는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서 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지금 임신 3개월이다. 아내는 분당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데 다행히 입덧은 없지만 하루종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매일 녹초가 되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는 나로서는 나의 일은 모두 내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보! 빨리 일어나. 벌써 7시 30분이란 말이야.

나 학교 늦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알았어. 일어 날께. 끄응

겨우 나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8시쯤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예. 송이 엄마예요. 네. 잠시만요.

아내는 문을 열고 송이 엄마를 맞았다.

해람아! 엄마 아빠 다녀올 테니 잘 놀아.

수고하세요. 네. 다녀오세요.

송이 엄마는 3살짜리 큰 딸인 해람이를 봐주고 있는 우리 아파트 옆 동의 아줌마로 초등 학교에 다니는 두 남매를 둔 30대 중반의 여자인데 해람이를 친자식같이 돌봐주고 있어

나와 아내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침에는 해람이를 데리러 오고, 저녁에는 아내가 데리러 가는 것이다.

식사 후에 아내와 나는 함께 자동차에 올랐다.

당신. 요즘 힘들지? 아니 아내는 순간 내게 거짓말을 했다.

자식이 있는 임신 초기의 직장 여성이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안해.. 내가 좀 도와줘야 하는데.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나의 이런 맘을 눈치챘는지 아내가 나는 괜찮아하고 화답했다.

어느새 차는 목적지인 오리 역에 도착했다. 나는 운전석에서 내리고 어느새 아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이 곳에서 우리는 헤어져 나는 전철을 이용해야 되고 아내는 구미동에 있는 학교로 가야 하는 것이다. 가게를 시작한 후 새롭게 자리잡은 우리의 생활 패턴이다.

여보! 수고해요. 그래. 당신도.

 

 

전철 안에서 나는 신문을 본다. 하루 중에 지금이 가장 한가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복정 역에서 3호선을 갈아타고 을지로 3가 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 뒤 목적지인 홍대역에서 내렸다.

5분 뒤에 나는 가게에 도착했다. 현재 시간 10시 20분. 13평짜리 과일 아이스크림 전문점 떼르 드 글라스 이곳이 현재 나의 일터인 것이다. 나는 개점 준비를 서둘렀다. 조명을 켠 뒤 문을 열고 행주를 빨아 테이블도 닦고..

11시 5분전에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백 실장이 도착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

인사를 한 뒤에 매일 아침 있는 5분 정도의 미팅을 가졌다. 회의 주제는 어제 매출과 오늘의 할일 등에 관한 것이 대부분 이었다.

첫째 달 일 평균 매출은 452,000원이었는데, 이번 달은 한달간 홍보도 되고 했으니 더

나아질 거야. 우리 잘 해 보자구.

그리고 나는 돌아오는 일요일 부산에서 막내 결혼식이 있어서 내려 가봐야 되니까 백 실장이 하얀이와 이번 주말에 수고를 좀 해줘야 되겠어.

미팅 후 백 실장이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백 실장을 어떻게 하지?.

백 실장은 가게 오픈 전에 본사 영업 담당인 신부장의 소개로 뽑은 여직원으로, 27살 된

아가씨인데 처음 면접 때도 별로 인상이 좋지 않았지만 전에 같이 일해 보았는데 아주 일을 잘하더라.라는 신부장의 강권으로 뽑은 여직원이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대로 손님들에게 좀 무뚝뚝하고 사무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이제 겨우 한달 지났는데 해고를 하면 지금 한창 바쁜 데 새로 아르바이트 생을 뽑아 쓸려면 시간이 걸리고 계속 쓰자니 속상하고 어떡한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에 첫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어떻게 드릴까요?

아저씨!. 콘에 딸기 하나 주세요.

아저씨라는 말은 가게를 시작한 뒤에 내가 손님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고 있는 말이다.

콘에 아이스크림을 담아주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제 내 나이 겨우 31살인데 아저씨라니! 응. 오빠다.오빠. 알겠니? 하긴 결혼한 여자는 모두 아줌마라 부르니, 결혼한 남자를 전부 다 아저씨라고 부른들 누가 어떻게 하겠는가!

 

토요일 오후 1시. 나는 아내와 딸과 함께 판교 나들 목에 막 진입하고 있었다.

늦은 봄 한낮의 고속 도로는 나들이 차량과 퇴근 차량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여보! 오늘 고생께나 하겠는걸. 처음부터 마음을 비우고 가는 게 좋겠어.

아침 일찍 출발할 수도 있었지만 아내가 교직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연가도 마음대로 내기 힘들어 수업을 마친 후 출발을 하였으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기차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집에서 역은 멀고 아내가 임신 중이고 해람이도 어리고하여 차로 가기로 한 것이었다.

천안까지 오는데 무려 2시간이나 걸렸다. 평소 같으면 1시간이면 닿을 수 있었을 텐데.

천안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출발했다. 다행히 천안 이후로는 교통 혼잡이 덜해 우리는 밤 8시경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고 부모님이 사시는 곳은 나들 목과 가까운 곳이어서 10분 후에 드디어 목적지인 부산 집에 다다를 수 있었다. 부모님은 아담한 2층 양옥집에 살고 계셨는데 부모님은 2층에 살고 계시고, 1층은 세를 주고 계셨다.

해람아! 아빠가 문을 열면 할머니,할아버지하고 불러야 한다.

하머니. 하다버지하고 딸아이가 부정확한 발음으로2번을 부르자,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제서야 들으셨는지 아이고. 우리 해람이 왔구나!하고 반겨주었다.

어머님. 아버님! 저희 왔습니다.

그래, 오느라고 고생 많았다.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너라.

충환이는 없어요?

응. 아직 안 들어 왔다. 내일 결혼할 놈이 뭐가 그리 바쁜지.

곧. 들어오겠지. 그때 둘째인 연숙이가 방에서 나와 인사를 했다.

오빠! 이제 왔나. 새 언니도 잘 지냈어요? 해람이도.

참. 너희들 시장할 텐데 어서 저녁 먹어야지.

아유. 어머니 음식을 왜 이리 많이 차리셨어요?

아니다. 차린 거 없지만 많이 먹어라.

어머니! 도련님 결혼 준비하시느라 힘드셨죠? 저희는 아무런 도움도 못해 드리고.

죄송해요.

 

결혼식은 다음날 지은 지 얼마 안된 K 구청 강당에서 있었다. 나는 여러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용환아!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어 돌아보니, 대학 시절 가장 가깝게

지낸 상종이가 뒤에 서 있었다.

잘 지냈니? 응. 그래 네 사업은 어떻니?

아직은 괜찮아. 이제 겨우 한달 지났는데. 좀더 지켜 봐야지.

상종이는 학교 졸업 후 수자원 공사에 들어가 현재 창원 지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도 다음 달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1주일 전에야 동생의 결혼 소식을 접한 상종이는 궁금했던지 내게 질문을 던졌다. 하긴 나도 5월초에야 동생 결혼 얘기를 접했으니 당연하겠지.

그 동안 충환이는 작년 말부터 취업하기 위해 여러 곳에 지원을 했었는데 IMF구제 금융이후 최악의 취업난을 맞아 번번이 실패하고, 계속 취업을 위해 애쓰고 있던 중이었다.

야. 그런데 충환이는 왜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됐냐?

응. 자식이 좀 조심하지는 않고 속도 위반을 해서 양가 부모님이 결혼을 먼저 시키기로 하셨나 봐. 결혼 후 취직할 때까지만 우리 부모님이 데리고 살기로 했는데, 5월초에

다행히 취직은 되어서 한시름 놓았지 뭐.

그랬었구나.

식장에서 결혼식이 곧 시작된다는 사회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상종이와 나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드디어 신부측 아버지와 친구라는 부산 D대학교 교수라는 분의 주례사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가관이었다. 길어서 지루할 뿐만 아니라 신부 아버지의 자랑에 주례사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었다. 딸이 결혼하는지 아버지가 결혼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신부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있다가 퇴직하고, 개인 사업도 하시던 양반인 모양이었다. 지금도 여기저기 사회 활동을 하고있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고. 딸은 충환이와 동갑으로 같은 부산의 P대학 법학과를 올해 졸업했고, 내가 직장 생활할 때 여러 번 보아서 아는

사이였다. 주례사는 신부를 사법고시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고 끝을 맺었는데, 나는

도무지 금시초문이었다. 제수씨 될 아가씨가 사법 고시를 공부한다는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3년 전에 결혼을 했고, 아무리 결혼식의 주인공이 신랑,신부라지만 너무 심한 것 같았다. 이게 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남의 눈을 너무 의식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점식 식사 후 나는 서둘러 부산을 떠났다.

 

다음날 저녁 강남 역 근처 N제과점에서 떼르 드 글라스 과일 아이스크림 전문점을 운영하는 점주들 모임이 처음으로 있었다. 현재 10여 개 점포가 운영중인 데 올들어 많이

개점을 하고 있었다. 모두 네 분이 모였는데,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저는 홍대점을 운영하고 있는 노 용환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분당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 남원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번 모임의 연락책으로 10년 넘게 건설 회사 현장을 누빈 30대 후반의 사나이였다.

저는 잠실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 성환입니다.

그는 전에는 식당을 했다는 50대 후반의 사람이다.

저는 이대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 현주라고 합니다 그녀는2년 전에 가장 먼저 문을 연 여사장이다.

먼저 바쁘신 와중에도 불구하고 참석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오늘 모임의

목적은 본사 주도의 정례 모임이 없기 때문에 점주 정례 모임에 대한 건의를 수 차례

했지만 답이 없어 점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정보도 서로 교환하고,본사에 건의할 사항이 있으면 의견 수렴도 해서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두 분은 개점한지 제법 되었지만 저나 홍대점 사장님은 아직 2달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먼저 개점한 선배 사장님들의 많은 도움을 부탁 드립니다. 그런데 요즘 매출은 어떻습니까? 홍대나 이대점은 대학가라 잘 되시죠? 역시 잠실점 사장은 장사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그런지 매출부터 물어왔다.

저는 대학가라 봄이 성수기인데, 아직 1개월밖에 되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나는 가볍게 받아 넘겼다. 우리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스크림 제조법,가게 운영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점주 모임을 2개월에 한번씩 가지기로 약속한 뒤 헤어졌다.

 

그 주 수요일 날 아침 미팅 때 나는 그 동안 고민하던 문제를 결국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백 실장! 지금까지 창업 멤버로 열심히 일했는데 이곳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사장님!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만두라는 말씀인가요? 그러면 미리 얘기를

해주셔야지 당일 해고하는 게 어디 있어요? 백 실장의 반발은 의외로 거세었다. 물론

나도 그녀의 입장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직원 1명과 아르바이트 생

하나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한명이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그만큼 힘들어지는 것이다.

좋게 그만두는 것도 아닌데 새로 사람을 뽑을 때까지 같이 일한다는 것은 서로 괴로운 것이다.

물론 나도 백 실장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미리 얘기를 하면 이미 마음은

떠나 있는데 일이 제대로 되겠어. 그래서 얘기할 수가 없었어.

그건 사장님 입장만 생각하시는 거잖아요. 저도 준비할 시간을 주셔야지요.

나는 겨우 백 실장을 달랜 후, 5일치 월급을 주고 돌려보냈다.

휴우. 다음에는 신중하게 뽑아야지. 나는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잠시 후 가게 전면 유리 위에는 아래와 같은 구인 광고문이 붙어 있었다.

[여 알바 구함.

시간 : 오후 1시~6시

문의 : 324-8483]

며칠은 고생 해야겠지.

 

어서 오십시오? 어려보이는 여학생 한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저 여기 알바 생 구해요?

아르바이트 할려구요?

저기 잠깐 앉으시겠어요? 나는 볼펜과 메모지를 들고 그녀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았다.

몇 가지 좀 여쭤 볼께요?

지금 하시는 일은요? 재수하고 있어요.

지금이 5월인데 수능 준비 하려면 바쁘지 않나요?

저는 연극 영화학과 지망생이라 괜찮아요.

아르바이트는 뭐 해보셨어요? 옷 가게하고 식당에서요.

재수생이라는 것이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활발해 보이고 좋은 인상에 일손이 달린 나는

그녀를 채용하기로 했다.

내일부터 나오도록 해요 저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뭐죠? 1,3주 월요일 날 집에 일이 있어 쉬었으면 하는데요.

우리 가게는 한 달에 평일 하루밖에 못 쉬는데..

음. 알았어요. 특별히 이틀 쉬게 해주는 대신 더 열심히 일하도록 해요.

저녁 알바 생은 기숙사에 있는 홍대 동양화과의 1학년 학생이었는데 싹싹하고 밝아서 나는내심 오래 일해 주었으면 했는데, 부모님이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해서 한달 일하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새로 채용한 여학생이 오늘이 3일째 된 상황이라 손님은 늘고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지난 달에 비해 매출은 이미 15%정도 늘어나 있었다.

 

다음날부터 2일에 걸쳐 알바 생 교육이 진행되었다. 아침에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둔 후 교육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손님이 오면 중단될 수밖에 없어서 시간이 많이 걸릴 수 밖에 없다. 교육은 철저히 실습 위주로 진행을 하는데 내용은 아이스크림 종류,맛,구분,푸기,

손님 대하는 법,부자재 사용법,위치,매장 관리 등으로 되어 있고 각 단계별로 내가 손님이 되어 테스트를 거쳐 통과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실습을 마치고 나면 바로 실전에 투입이 되는데, 교육 할 때는 그런대로 잘하더니 실전에 돌입하니 손님을 무뚝뚝하게 대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이라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똑 같은 것이었다.

경희야! 너 연기 전공한다고 하지 않았니. 손님한테 좀 친절하게 대해봐. 정 안되면 연기

한다고 생각하고 손님에게 대해보렴.

이틀 후 매출 체크를 하는데 2만원이 넘게 돈이 부족했다. 나는 하루에 오후,밤 두 번에 걸쳐 매출 체크를 해 왔는데 오후에는 5시경에,밤에는 10시 경에 해왔다. 알바 생이 매출

체크 뒤 내가 확인하곤 했는데 오늘 오후에는 손님이 별로 없어 틀릴 것도 없었는데 8만원 중에 2만원이 넘게 부족한 것이다.

경희야! 이게 어떻게 된 거니. 오늘 오후에 점심 시간에 내가 식사하러 1시간 가게를

비운 것 외에는 계속 가게에 있었는데. 저는 모르겠는데요

나는 속에서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니 이런 기본도 안된 애가 다 있지. 내가 계산을 잘못했을 리는 없을 테고. 틀려도 몇 천원 안팎인데.자기가 계산을 잘못한 것 아니면 돈을 가져 갔다는 것 밖에 안 되는데 모르겠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 일단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해도 시원찮은 판에. 성질 같아서는 일주일동안 일한 월급도 주지 않고 싶었지만 잘못 채용한 나의 책임도 있고 해서 일한 동안의 월급은 주어서 보냈다.

 

2. 조직 생활

 

1) 신입 사원

 

자 여기 보세요. 번호를 호명하면 세 사람씩 김 주임을 따라 대회의실로 올라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앞 조의 면접이 끝나면 번호대로 들어가서 면접을 보면 됩니다. 긴장을 풀고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세요. 인사과의 김 과장이라는 30대 초반의 책임자의 말을 면접을

보러 온 30명의 취업 준비 생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경청하고 있었다.

야! 씨발 이거 취직하기 더럽게 힘들구만.

그럼 쉬운 줄 알았냐. 나는 긴장이 되서 화장실에 벌써 두 번이나 갔다 왔다.

서류 전형 경쟁율이 20:1이고, 면접 경쟁률이 3:1이나 된대..

뭐라고! 그러면 면접을 3명씩 한조가 되어서 보니까 3명중 2명이 탈락이라는 얘기네.

이번에 우리 과에서는 4명이 지원을 했는데 다행히 서류 전형에는 모두다 붙었다. 우리 학교는 부산에 있어, 지원자4명은 어제 버스로 이곳 성남에 도착해 여관에서 1박하고 오늘 면접 장소에서 같이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가 지원한 회사는 삼성 지이 의료기기라는 회사로 국내 삼성 그룹과 미국 General Electric사의 합작 회사로 병원의 X-ray,CT,MRI,NM,US같은 방사선과 의료 기기를 수입,

판매,서비스하는 회사였다. 이 회사를 지원한 이유는 나의 전공이 의용 공학과(Medical Engineering)이기 때문이었는데, 나로서는 전공을 최대한 살린 셈이었다. 본사는 이곳 성남에 있고 5곳의 지방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직원은 250명이라고 하였다.

24번. 김 인수씨!

다음 조니까 준비해요. 인수는 서비스 사업부에 지원한 같은 과의 친구다.

10분 후 인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기실인 식당으로 돌아왔다.

야. 인수야. 면접관이 뭐 물어 보대.

보나마나 나 떨어졌다.

이거 저거 물어보는데 영어로 답변하는 것이 있었는데, 너희들 알다시피 내가 말을 좀 더듬거리지 않냐? 그래서 제대로 답변을 못했어

영어로 답변을 해야 된다고. 나는 이제 죽었다.

준호는 나와 같이 판매 사업부에 지원한 친구인데 엄살을 떨었다.

30분후 41번인 나는 42번 성훈이와 나란히 면접실로 사용하고 있는 대회의실로 향했다.

대회의실은 2층에 있었는데, 일하던 직원들이 힐끔 힐끔 쳐다보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향하는 소떼를 보듯이.

 

면접관은 모두 7명이었는데 막상 면접실에 들어가자 나는 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원 동기, 포부,대학 생활 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는데 드디어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해보라고 했다.

먼저 41번부터 답해보세요.

I was born KyungsangNam-do Hamyang-gun in 1969. My family moved to Pusan-city when I was nine years old. My family is composed of 5 members. ….

나는 긴장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더듬더듬. 마치 지렁이가 꿈틀대듯이.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몁접관의 차가운 목소리가 방안을 울려 퍼졌다.

됐어요. 그만. 42번 해보세요.

그런데 42번 성훈이는 아주 유창하게 자기 소개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성훈이가 영어를 저렇게 잘했었나 하고 생각했다.

잠깐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앉아있던 40대 후반의 면접관이 말을 잘랐다.

42번 최성훈씨.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잘하는데,혹시 외워서 하는 거 아닙니까?

역시 베테랑다운 면접관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순간 성훈이의 얼굴에 당혹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것도 잠시 성훈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음. 43번

43번은 영남대 경제학과에 재학중인 지원자인데 무난히 자기 소개를 했다.

면접실을 나온 성훈이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우린 둘 다 떨어졌다라고 말하는 듯 했다. 9시에 시작된 면접은 11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인사 과장은 그냥 가지 말고 면접 비를 받아가라고 했다.

수도권에서 온 지원자는 차비와 일당 2만원,지방에서 온 지원자는 5만원씩 받아가라고 했다. 최종 합격자는 2주후 그러니까 11월 20일까지 개별 통보하도록 하고,신입 사원 연수는 12월 1일부터 일주일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교통비라도 건진 것만도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부산으로 돌아온 나는 불합격을 확신하고11월 초에 다른 회사의 면접을 보았다. 이 회사는 중외 메디칼이라는 회사로 중외 제약의 계열사인데 일본 히다찌(Hitachi) 사의 의료 장비를 수입,판매,서비스하는 회사다. 본사는 서울 대방동에 있었다. 나는 두 번째 면접이라 그런지 긴장도 덜했고 무난히 답한 것 같았다. 면접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11월19일에 중외 메디칼로부터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다음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삼성 지이 의료 기기로부터도 합격 통지를 받았다. 두 회사를 두고 부모님과 상의한 끝에 회사의 규모,장래 발전 가능성 등을 고려하여 삼성 지이 의료기기를 선택하기로 하고, 신입 사원 연수가 10일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성남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성남은 전혀 연고가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빨리 거처를 정해야 했던 것이다.

 

성남 모란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우리는 근처 부동산에 들렀다. 왜냐하면 회사 본사는 공단에 있었지만 모란 역 부근에 방을 구하면 버스를 타고도 20분 정도면 출근할 수 있고 교통도 편리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내일 출근을 해야 되기 때문에 오늘 안으로 방을 구해야 했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중개사의 말을 들어보니 시간이 촉박해서 물건 구하기가 쉽지 않단다. 그러면서 성남은

구릉 지대가 많아서 반 지하 방이 많은데 지금은 그것도 구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다. 아버지는 일단 시간이 촉박하니 우선 거기서 살다가 나중에 결혼하면 집을 옮기면

어떻겠냐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나는 반 지하 방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알았다고 대답했다. 계약을 한 후 짐은 일주일 있다 옮기기로 하고 부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모두 조용히 하시고 10분 휴식한 뒤에 정문 앞에 있는 버스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동기생은 모두 20명이었는데 우리는 모두 2주간의 연수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연수 기간은 2주였고,장소는 용인에 있는 H그룹 연수원이었다.

2주간의 연수를 마치고 내가 지원한 판매 사업부에는 나와 면접을 같이 보았던 영남대 경제학과 출신의 신 동민, 전북대 전자 공학과의 최 지명,그리고 나와 동기인 김 준호 이렇게 4명이었다. 부서별로 배치된 신입 사원들은 근무중인 선배들을 찾아가 일일이 인사를 했다.

판매 사업부 회의실에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라는 선배 사원으로부터 장비별로

일주간의 교육을 받았다. 교육후 동민이와 지명이는 현장 영업 사원인

SR(Sales Representative)로, 나와 준호는 전공 때문인지 스페셜리스트로 각각

발령을 받았다.

당시 판매 사업부는 사업 부장인 이사를 필두로 본사와 부산,대구,대전,광주의 4개의 지방 영업 팀과 지원 부서인 영업 관리와 마케팅 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시 마케팅 팀은 제품을 담당하는 Product Specialist와 임상을 담당하는 임상 스페셜리스트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맡은 장비는 CT(Computed Tomography)라는 장비로, 이는 인체의

단면을 투과한 X선을 컴퓨터로 수치화해서 사진으로 보여주는 장비인데 나의 주요 업무는 영업 사원 제품 교육과 아시아 CT 마케팅 책임자와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영업 사원 판매 지원 세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드디어 사회인으로서 첫 발을 디딘 셈이었다.

 

2) 변경된 계획

 

1995년 1월말 청주의 한 카페에 난 그녀와 마주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노 용환이라고 합니다. 나는 지금 소개팅 중이다. 소개해준 사람은

사촌 여동생으로 1월 초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 소개팅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그녀는 올해 청주 교대를 졸업할 예정이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아래였다. 맞은 편의 미희라는 여자도 같은 과의 친구로 임용 대기중이라고 했다. 이즈음 초.중등 교사는 예전과 달리

임용 시험을 치러 합격한 사람에 한해 성적 순위대로 발령을 해주고 있었다.

자 그럼 나는 갈 테니까 두 분이서 좋은 시간 가지세요하고, 사촌 여동생은 휑하니

나가버렸다.

저 소개팅 같은 것 전에 많이 해보셨어요?

아닙니다. 이번이 처음입니다

네. 저도 그래요그녀는 키는 좀 컸지만 평범한 인상에 조금은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임용 대기중이라고 하셨는데,정식 발령은 언제쯤 나게 되나요?

정확히는 잘 몰라요. 시험 성적이 별로여서 올 가을쯤에나 되어야 될 것 같아요

저도 연수 받고 부서 배치 받은 지 이제 막 한달 지났어요.시쳇말로 뺑이치고 있죠

저 무슨 일을 하세요?

네. 삼성과 미국 GE라는 회사의 합작사인데 저는 판매 사업부에서 제품 마케팅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고향은 경북 문경이고 부모님은

농사를 짓고 있으며, 청주에는 대학 때부터 오빠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와는 식사 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연락처를 서로 교환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큰 두통 고리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2층에 살고있는 주인집으로

올라갔다. 딩동하는 벨 소리가 6번을 울리자 그제서야 주인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예요?그녀는 나의 방문 이유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능청을

떨고 있었다.

보일러 때문에요. 어제 토요일까지 손봐준다고 말씀 하셨는데 아직 그대로네요. 한겨울에

보일러도 안 되는 방에서 자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딱 동태되기 쉽상이죠.

총각. 아유 미안해요. 남편이 잘 아는 기사가 어제까지 고쳐준다고 했는데 바빠서 그런지 못 온 모양이네요. 제가 다시 연락해 볼 테니 내일까지는 해결될 거에요.

어유 저 능구렁이. 나는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주인 여자는 뭐 하는 여자인지는

몰라도 저녁 무렵에 집을 나가곤 했고, 남편은 얼굴 보기가 어려워서 금요일 새벽에

보일러가 터져서 들렀을 때도 집에는 아이들 밖에 없었다. 술집을 하나.

알았으니 내일까지는 꼭 고쳐 놓으셔야 합니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전기 장판에

코드를 꽂고,이불을 잔뜩 끌어당겼다. 보일러가 고장이 나기 전에도 내 방은 우풍이 심해

바닥만 따듯하고 실내는 냉방이었는데,그것마저 없으니 시베리아가 따로 없었다. 자비로

고칠 수도 있었지만 집에 있지도 않는 주인 여자한테 언제 돈을 받을지 몰라 우선 급한

김에 전기 장판이라도 사 둔 것이었다.

 

그 해7월 어느날 나와 미희는 잔뜩 긴장한 채로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미희야! 우리 결혼하자

네? 갑작스런 나의 결혼 제의에 그녀는 몹시 당황해 하고 있었다.

오빠. 갑자기 결혼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우리는 첫 만남이후 주말에 거의 매주 청주와 성남을 오가며 만남을 가져왔고, 2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그녀는 나를 오빠라고 터였다.

둘 다 객지 생활하고 있는데,빨리 결혼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

그래도 저는 나이도 아직 어리고,발령도 아직 나지 안았고 준비된 것도 하나도 없어요.

발령이 나면 오빠도 알다시피 2~3년 정도 일한 후에 제가 벌어서 시집가야 되요.

그녀의 얘기는 조금도 엄살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시골에서 힘들게 농사를 지어 대학까지 보냈으니 결혼 준비는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집 형편은 조금 나았지만 나도평범한 가정이었기에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것 외에는 그녀와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나는 그 동안의 만남을 통해 그녀에게 구체적인 결혼과 가정 생 등에 대한 그림들을

보여주곤 했었다. 내가 생각해 온 가정의 모습,부모의 역할등등. 그 때마다 그녀는 저는

그런 구체적인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하면서 놀라곤 했다.

하지만 어찌 그녀 뿐이랴. 우리나라 대부분의 가정이 결혼 전에 어떤 아빠,엄마,가정을 이루기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으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학교 졸업해서 몇 년 직장 생활하다 나이가 되면 결혼하는. 물론 준비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돈이 있지

않은가? 그런 반면에 나의 경우에는 부모님의 가정 생활을 통해서도 배우고,책,토론 등을 통해 대학 생활을 하면서 진지하게 이런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과정을 거쳤었다.

 

취직하면서 대학교 다닐 적에 자취와 기숙사 생활을 해본 것을 제외하고는 객지 생활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집을 떠나올 때 지금까지 부모님의 도움으로 이만큼 컸으니 결혼만큼은 나의 힘으로 벌어서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실제 객지 생활을

해가면서 조금씩 변해갔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직장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 텅 빈 방안에 혼자 있으면서 느끼는 외로움,문제가 많은 주거 공간(지난 겨울의 보일러 사건 이외에도 이른 장마비에 비가 새어 벽지는 젖어 벽은 곰팡이가 슬고,방으로 통하는 조그만 주방은 하수관이 역류해 오물로 뒤범벅이 되고…) 등으로 인해 초기의 나의 결심은 조금씩 변해왔었다. 빨리 객지에서 자리를 잡아야 되겠다는 쪽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결혼이 급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이 호감은 있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절대적인 것이 되어야 했다.

걱정하지 말고 너는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돼. 먼저 이번 주말 부산에 내려가 우리 부모님께 인사부터 드리기로 하자. 그런 다음 미희 부모님께도 인사 드리고

 

안돼.

왜 안 된다는 거야.

아직 네 나이도 어리고 발령도 나지 않았고 그 사람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네가 아직 잘 알지도 못하면서 벌써 결혼이라니!

미희네 오빠는 그때 문경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주 상고에 진학하여 지방 은행 전산실에 다니고 있었는데, 이미 결혼을 하여 애기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일찍 결혼을 해서 그렇지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다. 미희는 대학교 때부터 오빠와 같이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후견인 역할을 해오고 있는 셈이었다. 미희는 부모님의 허락을 얻기 전에 오빠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부모님에 앞서 얘기를 한 것인데,의외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지난 주말에 나와 미희는 부산에 들러 부모님의 승낙을 이미 얻어둔 상태였다. 나의 아버지는 여자의 사회 생활에 대해 자아 실현은 물론이고 여성의 사회 참여와

국가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이전부터 해오셨기 때문에 미희가 직업을 갖고있는 것을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좀 싹싹한 면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지만 객지 생활을 하는 아들이 좋아하니 별다른 반대는 없으셨다.

 

그 해 8월의 어느 날 양가 부모는 청주의 한 식당에서 드디어 첫 만남을 가졌다. 우리

측은 부모님과 나, 미희는 부모님과 오빠 내외가 그 자리에 참석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용환이 애비되는 사람입니다. 갑작스런 따님 결혼 소식에 많이

놀라셨죠

예 조금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사돈께서 앞으로 여러 가지 부족한 제 딸을 예쁘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희 집은 농사를 지고 있기 때문에 모아둔 돈도 없고 지가 벌어서 시집을 가야 하는데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하니 빈 손으로 보내야 될 형편입니다.

그것은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방만 얻어주면 저희 둘이 맞벌이를 할 테니 금방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겝니다.그것은 정말 그랬다. 결혼식 비용과 혼수 비용으로 300만원을 받은 것이 전부였는데, 나의 부모님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안 하시니 그런 면에서 정말 멋진 부모님이 아닌가? 이런 부모님이 우리 나라에 조금만 더 있어도 결혼과 혼수로 빚어지는 마찰과 문제들이 많이 해결될 수 있을 텐데..

 

그 해 12월 24일에 나와 미희는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 살림은 성남 태평 역 부근의 다세대 주택 1층 2,800만원짜리 방 두 칸 전세로 시작했다. 나는 이전 반 지하 방이 너무 문제가 많아 양가의 결혼 승낙을 얻은 뒤 9월부터 이 곳으로 먼저 이사 와서 살고 있었고,미희는 9월부터 용인에서 임시 교사로 2개월간 일한 뒤 11월부터 분당으로 정식 발령을 받아 동거를 해오고 있던 중이었다. 경기도는 인구가 계속 늘고 있는 중이라서 신설 학교도 많았고 그에 따라 교사 수요도 많아 지방의 많은 교대 생들이 경기도에 지원을 많이 했었는데 미희도 경기도에 지원을 했었고, 임용 고시 합격 후에는 나와 교제 중이었기 때문에 지역 선택을 성남으로 했던 것이다. 미희의 동기생의 경우에는 거의 절반 정도가 경기도를 지원하고 있었다. 신혼의 즐거움과 기대도 잠시 우리는 이미 각자의 생활에 몰입하고 있었다.

 

3) 마이 홈(My Home)

 

1996년 12월 중순 나는 드디어 나의 첫 집을 계약했다. 용인 수지 1지구에 있는 25평짜리 S아파트였는데 계약금은 국민 주택융자금 1,400만원을 포함해 1억원 이었다. 이사는 내년 1월초였다. 집으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을 맛보고 있었다.

하하하. 나도 내 집이 생겼다고.

누가 말했던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물론 필요만 있고 준비가 없다면 아무것도 안되겠지만.

인간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처음 것에 많은 애착을 갖기 마련이다. 첫 사랑,첫 경험,첫 여행 등등. 살기 힘든 대한 민국에서(한국 국민의 삶의 만족도는 국가의 경제력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어느 국제 기관의 통계 발표가 생각난다.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들보다도 훨씬

못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은 아주 각별한 것이다.

사실 결혼 후 나는 누구보다 내 집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졌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학생 때는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신앙 서적과 다방면의 교양 서적을 탐독했었는데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그것이 경제,경영과 관련된 책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재테크(금융,부동산,기타등등)와 관련된 책도 많이 보았었다.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의 내용도 많이 스크랩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수입은 저축을 해야 한다는 맞벌이 부부의 가장 기본적인 나름의 재테크의 원칙을 세웠다.

남보다 빨리 내가 집을 소유하게 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나의 신혼 집은 1층 이었는데도 다세대 주택이 밀집해 있어서인지 햇볕이 잘 들지 않았고 추웠다. 그리고 봄에 아버지가 영업부에서 일한다고 소형차를 사 주셨는데,주차 공간이 부족해서 매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런 일을 통해 나는 생각하길 2세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키워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나와 아내의 직장도 가깝고 환경도 좋은 용인 수지 2지구에 내년에 신규 분양을 받을 생각이었는데,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우선 분양하는 것으로 청약 제도가 바뀌면서 계획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낮은 주거 환경에서 살다 2~3년 뒤에 이사를 갈 것인가 아니면 대출을 받아 먼저 좀더 나은 주거 환경에서 살 것인가를 두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전세금 2,800만원,첫해 저축 2,000만원,부모님의 지원 2,000만원,회사 사우회 대출 1,000만원,마이너스 통장 대출1,000만원으로 우리는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얘기지만 처음 내 집으로 이사 하던 날 포장 이사 비용이 없어 부산에서 부모님과 남동생이 총 동원되어 이사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해에 대출금 2,000만원을 모두 갚아 진정한 의미에서 내 집을 가질 수 있었다.

 

4) 퇴직

 

1998년 12월 어느 날 아침 나는 출근해 여느 때처럼 싱글을 열었다. 싱글은 삼성 그룹 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공동 전산망이었다. 여러 편지 중 발신인이 인사과 장 주임인 것부터 클릭해 보았다. 이즈음은 인사 고과 철이라 난 고과와 관련된 내용이라 생각했고 ,업무 실적에 대해 자신이 있던 터라 약간의 기대감도 갖고 있었다.

당신의 고과는 C입니다.난 내 눈을 의심했지만 거기에는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삼성 그룹 인사 고과 제도는 전체 인원의 상위10% 에 A, 20%에게 B, 60%에게 C, 나머지 10% 에게 낙제나 다름없는D를 주었고,전사적으로 아주 뛰어난 2~3명에게 슈퍼 A를 주어 특별 포상했다.

이 여자가 잘못 보낸 것은 아닐까? 아니다 몇 번을 확인했을 테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난 화가 나기 이전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지난 1년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나는 지난3년 동안 판매 사업부에서 CT 스페셜리스트로서 마케팅 일을 하다 올 초부터 품질 경영 팀으로 옮겨 판매 사업부를 담당하는 식스 시그마 블랙 벨트(Black Belt)로 일해 왔다.

식스 시그마는 처음에는 모토롤라에서 품질 혁신 운동으로 시작해 GE에서 전사적인 기업 경영 혁신 운동으로 발전해 온 터였다. IMF 구제 금융이후 내가 몸담았던 회사도 덜하긴 했지만 불황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매출과 이익면에서는 이전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대신 전사적인 돌파구로서 식스 시그마에 매달린 것이었다. 블랙 벨트는 자기가 맡은

부서원들을 교육하고 그들이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주업무로 하고 있었다. 대표 이사는 식당 앞에 부서별 대상 인원과 프로젝트 수행 숫자 및 달성 율을 매주 게시해서 전사원을 독려했다.

내가 맡은 판매 사업부는 부서 특성상 프로젝트 설정이 서비스 사업부나 연구소 그리고 타 부서에 비해 어렵고 외근이 많아 어려움이 많았지만, 나는 지방 사무소의 경우에는 여러 번 출장을 가면서까지 노력했고 줄곧 서비스 사업부 다음으로 높은 실적을 유지했다. 그리고 9명의 블랙 벨트 중에 서비스 사업부 담당 과장과 함께 9월에 GE Medial Systems CEO인 제프 임멜트로부터 한국 방문시에 전사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식 블랙 벨트 인증서도 받았었다. 타 부서에서는 판매 사업부의 식스 시그마 전개 상황을 보고 놀라곤 했었다.

난 고과 항목 작성 때도 아주 높게 목표를 잡았음에도,자체 예비 고과 평가 때도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었다. 팀장도 팀 인원이 적어 A는 못 되도 B는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예고 없이 C라니..

난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이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다.

 

난 선배 중 한 명에게 이 사실을 털어 놓았다. 그 선배도 네가 일년간 어떻게 일했는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데 그건 너무했다고 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팀장이 내 고과를 바꾼 것으로 드러났고 이를 알아내는 과정

중에 불가피하게 여러 사람이 이 일을 알게 되었는데, 오히려 팀장인 방 부장은 이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가만히 있을 텐데 넌 왜 그렇게 난리 법석이냐는 듯이. 나는 이 일을 그냥 넘길 수가 없어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제프 임멜트를 비롯해 아시아 인사 담당 책임자 그리고 대표 이사에게 보낼 생각으로 메일을 준비했다. 나는 정성 들여 장문의 메일을 작성했고 클릭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지 인사

담당 김 과장이 나를 조용히 불러 팀장과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만남을 주선할 테니 노 주임이 조그만 참으라고 했다. 나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번 일이 확대될 경우에 책임자인 자기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워서겠지.

 

인사 과장으로부터 메일 얘기를 듣고 그제서야 사태 파악을 했는지 그제서야 팀장이 오늘 오후에 남한 산성에 있는 카페에서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점심 식사 후 나는 팀장의 차를 타고 카페로 향했는데 우린 둘 다 말이 없었다. 카페 안은 겨울 오후인데도 한가한 중년

부인들이 여럿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우린 조용한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40대 중반의 사나이로 자기 처신에는 아주 능통한 사람이었다.

노 주임. 이번 고과 건은 결과적으로 아주 미안하게 됐어요.

아니 어떻게 다른 일도 아니고 사전 통보도 없이 고과를 바꿀 수가 있습니까?

미리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그만 기회를 놓치게 되어서 얘기를 못했어요.

그의 얘기로는 자기를 제외하고 우리 팀의 인원이 5명인데,고과가 할당이 되어 있어 식스 시그마 전체 책임자인 모 대리한테 고과를 잘 주고나니 나머진 모두 C가 되었단다.

자기가 의지만 있다면 지원 부서 전체에서 평가한 것으로 해서 원래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인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고 자기 수족이나 다름없는 모 대리는

챙기고 타 부서에서 옮긴 나는 자기 목표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는 하지만 자기 비위는 잘 맞춰 주지 못하니까 밀렸겠지. 그러면서 다음 번에는 고과를 잘 주겠단다. 난 그 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판매 사업부의 식스 시그마 관련 올해 목표의 대부분을 달성해서 내년에는 목표가 적을 것이 뻔한데 그때는 또 다른 핑계를 대겠지.

그는 온갖 감언 이설을 늘어놓으며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나를 무마시키기에 바빴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메일 보내면 저 인간은 해고될 것이 뻔한데 물론 나도 이 회사에 남긴 힘들겠지만 젊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전업 주부인 아내와 중고생 두 딸을 둔 40대 중반의 저 사람은 이 불경기에 어디에 갈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알았다며 메일은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연말에 경비 절감을 위해 전사 인력을 10% 정도 줄인다고 하면서 부서별로 신청을 받는다고 했다. 회사 경영 상황이 그 정도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GE에 우리도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팀장은 우리 팀에도 1명이 할당 되었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기가 나가면 안되나.

우리 팀의 경우에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으면 고졸 여사원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밤에 야간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면 당장

그녀 가정은 생계에 위협을 받을 것이다.

이미 회사에 아무런 애착도 없어져 버린 나는 팀장에게 내가 나가겠다고 했다.

그는 왜 노 주임이 나가느냐고 했지만 난 아직 그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그의 말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다음 해 1월 말일부로 4년 2개월 동안의 나의 직장 생활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종지부를 찍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왜 노 주임이 회사를 그만두냐고 했다.

 

 

3. 3년후

 

1) 창업

 

여보세요

사장님 안녕하세요. 미스터 바리깡의 배 인중입니다. 지금 홍대 앞으로 나오실 수 있으세요?

홍대요. 알겠습니다. 그럼 거기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버스에 앉아 지난 한달간의 시간을 반추해 보았다. 퇴직은 1월 말이었지만 나는 1월 초부터 창업 관련 서적과

인터넷등을 뒤지며,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알아 보았었다. 하지만 그 자료라는 것이 턱없이 부족했고 대동 소이한 것들 뿐이었다. 물론 내가 일하던 분야가 특수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전직은 가능하겠지만 내 또래 나이에는 책임만 있고 권한은 없는 우리 나라의 조직 생활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나려는 생각도 했었다. 내가 아직 젊고 영어로 의사 소통도 가능하고 합작 회사에 다녔으니 생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지만,평생 직업으로 택한 교직에 있는 아내 때문에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의 필요에 아내를 아무렇게나 맞출 수는 없지 않겠는가? 1개월 여에 걸친 자료 수집과 조사 끝에 나는 남성 헤어 커트 전문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7~8,000만원 대의 자금으로 창업이 가능했고,현금 장사이며 사람의 머리 카락은 계속 자라기 때문에 불황을 타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미용 기술이 없는 문외한이라 사람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력 관리가 중요하리라는 것도 염두에 두었었다.

그 당시 남성 헤어 커트 전문 체인은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10여 개의 체인점을 가진

블루 클럽이라는 곳이고,하나는 이제 막 시작한 신생 업체였다. 전자는 1,00만원의 보증금을 요구하고 있어 자금이 부족했던 나는 두 곳이 크게 차이가 없어보여 후자를 택하기로

하고 점포를 알아보던 중이었다. 처음에는 집과 가까운 성남 시청 근처를 알아 보았는데

체인점에서 얘기한 임대료와 실제 건물주가 요구한 임대료가 틀려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 후 송파,한양대,경희대,성균관대 등지의 여러 점포를 본사가 소개해 주었는데

얘기가 마무리 되었다고 해서 가보면 전 세입자와 정리가 안되어 있거나 가게 주인과 얘기가 틀려 머나먼 이곳 홍대까지 온 것이었다.

 

사장님. 점포는 여기 위에 있는 5층 건물의 1층 13평 가게로 전에는 리바이스

있었는데 세입자와는 얘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보증금은 3,000만원이고 권리금은 처음에 4,300만원을 요구했는데 저희가 작업을 해서 2,300만원까지 조정해 두었습니다. 월세는

98만원 이구요.

체인 본사의 점포 담당 박 실장이라는 사람은 입에 침을 튀기며,자기들의 며칠간의 노력을

알아 달라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 동안의 나의 마음 고생은 자기들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아.그래요. 일단 가게를 한번 보죠.나는 한달간에 걸친 점포 물색으로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 본사가 수 차례 얘기가 틀렸기 때문에 아직 그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가게는 홍대 정문에서 150미터 정도 아래에 있었는데,입구에 2개의 계단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제껏 보아온 점포보다는 가격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 그 동안도 나는 본사에서 가게를 물색해두면, 나중에 혼자 가서 유동 인구와 상권 분석을 해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점포를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나는 곧 가게 주인이라는 40대 초반의 점잖아 보이는 남자와

근처의 커피숍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사장님 조건은 이 분들한테 모두 들었으니 계약을 하시죠.

저 그런데 미용실을 한다고 들었는데 2층에도 미용실이 하나 있는데 원장한테 미리 업종에 대해 얘기를 해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장님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여성을 주 고객으로 하는 미용실이 아니고 남성을 상대로 하는 남성 헤어 커트 전문점이기

때문에 업종간의 마찰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나는 할 수 없이 그 사람을 통해 미용실 원장에게 가부를 확인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여자는 막무가내로 안 된다고 했다. 난 이런 무식한 여자가 다 있나 하고 욕이 절로 나왔으나 별 수가 없었다.

사장님. 이거 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체인 본사의 김 이사와 박 실장은 나에게 사과를 했지만 그들의 얘기는 이미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이제부터 점포는 내가 손수 알아보리라 마음 먹고, 어제 본 홍대 앞의 그

가게를 기준으로 삼기 위해 다시 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제 그 사장에게 전화를 해 보았는데 가게가 아직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통화 후 나는 가게를 얻기도 어려운 데 일단 가게부터 얻고 업종을 정하기로 마음먹고 사장과 다시 통화 후에 계약을 했다. 권리금 잔금을 치르고 건물주와 본 계약을 했다. 그런데 건물주는 나오지 않고 건물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계약을 대행했다. 계약 사항 중 특별한 것은 없었는데 내가 아직 업종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주일 안으로 업종을 선정해 알려 달라고 했다. 나는 당시 지역별 상권

분석 책을 참고로 해서 상권 지도를 다시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업종별 분포를 백분율로

표시했다. 그리고 난후 나의 자본,상권 특성,여건 등을 고려하여 적합한 업종을 2개로 압축해 나갔다. 하나는 브랜드 제과점으로 근처에 대형 업소가 있었지만,고가이므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체인점을 선택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생 과일 아이스크림 전문점으로 유명 아이스크림 전문점은 이미2곳이 있었지만, 매장에서 생 과일을 이용해 직접 만들기 때문에 기존 아이스크림에 비해 달지 않고 맛이 깔끔해 차별성이 있으므로 사업이 이제 막 도입된 상태였지만 홍보만 잘하면 승산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나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유는 전자는 전자는 일단 자금이 원래 예산 보다 4~5,000만원 이상 많이 필요했고, 제과점의 업종 특성상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늦게 닫아야 하는데 집이 너무 먼 관계로 어려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이사

 

올 겨울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예년에 비해 아주 춥겠습니다.

11시경 나는 아내와 해람이를 차에 태우면서 추위에 몸이 절로 움츠려 들어옴을 느끼며

일기 예보가 맞을 때도 있군 하며 생각했다. 시동을 켠 차는 일산으로 가기 위해 강북

강변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집을 알아보러 가는 중이었다.

재작년에 사업을 시작할 당시1억원의 창업 자금 중에 3,00만원의 대출금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해 모두 상환했고, 작년에 모은 4,000만원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결국 집을 사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가게를 하나 더 내기에도 자금이 부족했고 집을 사려해도 대출을 받아야 했는데, 현실적인 주거 만족을 우선하여 선택했던 것이다. 작년 10월에 내가 가게로 출퇴근이 어려워 용인 수지의 집을 팔아 전세금의 차액과 전세금을 합해 가게에서 가까운 S동 22평 아파트로 이사를 온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나는 결혼 후에 5년 동안 4번이나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이제는 한 곳에 정착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이사 후보지는 목동과 일산 2곳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일산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둘은 각각 장단점이 있었는데, 목동은 27평 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가 있었고 가게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나에게는 좋았고 고양에 직장이 있는 아내에게는 조금 불편했다.

일산으로 이사를 가면 32평으로 이사를 갈 수가 있었고, 목동과는 반대로 나는 출퇴근이 조금 어렵지만 아내에게는 유리했다. 그 외 아이들 교육 여건과 주거 환경은 모두 좋았다.

고민하던 끝에 나는 내가 희생하기로 마음먹고 좀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위해 일산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출발 전에 나는 일산에 대한 자료를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교통과

교육,주거 환경 등을 고려하여 마두 역 근처에 있는 K마을로 후보를 압축해 두었었다.

 

실례합니다. 집 좀 보러 왔는데요. 근처에 32평짜리 아파트 매물 좀 있습니까?

우리는 K마을 근처의 한 부동산에 먼저 시세와 매물을 알아보기 위해 들렀다.

아유 밖이 많이 추우시죠. 일단 이 쪽으로 않으세요.

30대 중반의 여자는 친절하게 우리 일행을 맞았다.

시세는 1억 5천에서 7천까지이고,동이나 향에 따라 가격이 정해져요. 그리고 이 곳에 32평형은 U,D,L아파트가 있는 데 U아파트가 조금 비싸고 나머지 둘은 비슷합니다.

그건 왜죠?나는 이유가 궁금해 물었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 아파트가 튼튼하게 지어졌다고 주변에 소문이 나서 그래요.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파트 구경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잠깐만요. 제가 연락 좀 해 보구요.

그 여자의 주선으로 우리는 U와 D 아파트 한 곳씩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틀 후 나는 다시 K마을로 가서 아파트를 물러보며 각각의 배치,세대 수,주변 여건 등을 확인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 7시에 거기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전화 통화를 한후 나는 새마을 금고에 들러 계약금조로 천만원을 찾아 두었다.

나는 일산을 두 번째 갔다 온 일주일 뒤에 한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에서 L아파트 9층이 1억 5천에 시세보다 천만원 이상 싼 매물로 나와 있어 확인해 본 결과 서울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집주인의 친구가 올린 것으로 사실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이

먼저 계약하자고 할까 봐 바로 계약하자고 했다.

전날 눈으로 도로가 막혀 우리는 겨우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저 죄송하지만 그 가격에는 이 친구가 팔 수가 없다는데요하고 친구 되는 부동산

중개인이 얘기했다. 아니 이게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인가.

아니 그러면 얼마에 매매를 하겠다는 겁니까?하고 나는 따지듯 물었다.

아예 팔지를 않겠답니다.

아니 뭐라구요?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이 추운 날 계약하려고 은행에 들러 계약금 준비해서 온 가족이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순간 매도인의 마음이 바뀐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먼저 도착해서 시세를 알아보니 자기가 내놓은 가격보다 천만원 넘게 비싼 것을 알고 마음이 바뀐 것이 아닐까? 나는 20여분이상 실랑이를 하다 그냥 가려고 하는 두 사람이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것을 보고 기름값이라도 내라고 했다. 기름 값3만원을 받아 들고 집으로 향했지만 분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를 않았다. 일주일 후 일산의 한 부동산 중개 사무실이 인터넷에 올린 매물을 14,700만원에 계약했다. L아파트의 다른 동 15층 중 9층이었는데 지난번 허탕친 동보다 위치는 못했지만 시세보다는 1,000만원 이상 저렴한 가격이었다. 가격이 시세보다 훨씬 싼 데는 남편이 대출을 받아 주식을 했는데 실패하고 그 대출금 이자가 버거워 급 매물로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계약 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더니,어머니는 아이고 우리 아들 장하다며 아주 좋아하셨다. 이사 날짜는 2월 말이었는데 그

전에 나는 아내와 밤에 시간을 내어 페인트 칠과 청소를 해두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사 갈 집에 도배와 장판도 새로 했다. 왜냐하면 이제 오래 살기로 하고 이사 올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이제 이사는 다시 안 간다고 내게 다짐하곤 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주 이사를 다녔으니 지긋지긋 할만도 하겠지. 비용은 전세금 6천과 현금 4천에 추가로 아파트를 담보로 4,700만원을 대출 받아 충당하기로 했다.

 

3) 수도승

 

저 사장님! 저희가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생 과일 아이스크림과 에스프레소 커피를 결합해

프렌치 키스라는 복합 매장으로 체인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도움을 좀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도 사장님에게 부 자재를 원가에 제공해 드리고 인테리어도 무상으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작년 5월30대 초,중반의 남자 두 명이 가게를 방문해 내게 던진 제안의 내용이었다.

그 동안 1년 이상 본사와 이런저런 업무를 해오면서 여러 가지 마찰이 많았던 나는 혼자서

독자적인 사업을 준비해 왔었는데,문제점으로 대두된 것이 자본과 같이 일할 동료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의가 궁금했던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현재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까?

사실 아직까지는 사업의 컨셉만 잡아둔 상태입니다.

그럼 이제 구체적인 준비를 해야겠군요.

네. 그래서 사장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필 왜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저희 사무실이 이 부근에 있고,사장님이 젊으셔서 저희와 얘기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만화 체인 사업을 해서 가맹점을 수백 개 운영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알았습니다. 제가 좀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그들과 헤어진 나는 아내와 상의도 해보면서 변경 전후의 득실을 이것저것 따져 보았다.

현재의 체인 본사는 체인점의 성공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개점 전에 목돈을 챙기고

개점 후에는 부 자재를 팔아 돈을 벌려는 놈들인데...

사실 그랬다. 내가 사업을 시작할 당시 10여 개 있던 체인점이 현재 40개가 되었지만 인력은 예전이나 똑같이 사장을 비롯해 총 4명이 전 체인점 관리를 맡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개점과 부 자재를 공급해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나를 비롯한 여러 체인점 사장님들이 의견을 모아 수 차례 건의를 했지만 이건 도무지 마이동풍이었다. 시행하면 도움이 되는데도 돈이 들거나 시간이 걸리는 일이면 무조건 못하겠다고 했다.

저 친구들은 내가 아니더라도 체인 사업은 반드시 할 생각인 것 같은데, 만약 내가 나중에 체인 사업을 하더라도 후발 주자에 또 후발 주자가 되니 성공할 수가 있을까? 설마 지금의 본사보다 더 못할 리는 없겠지? 나는 거의 2주동안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후 이 친구들과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김 사장님. 도움을 드릴 테니 우리 한번 잘해 봅시다.김 사장이란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지만 아직 총각이었다.

아이고 사장님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의 또 한번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7월초에 프렌치 키스라는 이름으로 같은 가게에서 새롭게 시작했지만,가을이 되도록 매출은 전년에 비해 약 15% 정도 줄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골치 아픈 이전의 체인 본사와 같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적었지만 내가 간과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이미 떼르 드 글라스라는 상호로 1년 이상 홍대 앞에서 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이름과 인테리어가 바뀌니 단골 손님마저 다른 가게가 생긴 줄 아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커피를 같이 판매했지만 고객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로는 오지만 커피를 마시러 오는 손님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커피를 통해 비수기 매출을 끌어 올리려는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으니 어쩌겠는가?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실패하고도 또다시 실패하는 사람과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

 

 

이전의 체인점 탈퇴를 본사에 통보했을 때 그제서야 그들은 난리가 났다. 가게에 사람을 데리고 와서 욕설과 협박을 하기도 하고 내용 증명을 보내 프렌치 키스를 그만두지

않으면 자기들의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보상 받기 위해 법적인 절차도 밟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다른 체인 점주 들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까 봐 나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기들이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배신했다고.

나는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대해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토대로 조목조목 답변을 해 주었고 결국에는 본사의 박 사장이 내게 사과를 하고, 나는 기존 체인 점주들은 프렌치

키스로 부추기지 않기로 하고 자기들은 내가 홍대 앞에서 영업을 하는 동안은 신규 점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결별을 했다.

 

3월말 가끔 들러 점심을 먹는 홍대 정문 앞의 중국 집에서 가게로 오던 중 나는 이상한 현수막 하나를 발견했다. 떼르 드 글라스 홍대점 4월초 오픈 예정. 그 곳은 가게로부터 홍대 정문 쪽으로 약 70미터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얼마 전까지크라운 베이커리

있던 자리였다. 나는 순간 머리 속이 아찔함을 느꼈다.

이런 개 같은 자식들.. 같은 라인에 생기면 시장은 뻔한데 서로 나눠먹기 밖에 안 되는 줄도 모르나. 본사 놈들이야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날 죽이겠다고 오픈을 해 주었겠지만,

거기에 속아 오픈을 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바보인가?

 

 

제목  7년 간의 일기(?) <-- 나의 인생 이야기  (2/2)

 

물론 무언가 나름의 특혜는 주었겠지만 그래도 현명하지 못한 판단 임엔 분명했다.

아이스크림 맛은 내가 더 낫고 단골도 많겠지만 그곳이 위치가 더 좋기 때문에 시장이 양분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2억 정도를 투자했겠지.

자본 주의 하에서 돈의 위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개점 전 떼르 드 글라스의 30대 중반의 영업 담당인 신부장을 만났더니, 미안하다며 연신 구구절절 변명만 늘어 놓았다.

아이고 이거 노 사장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신부장. 이건 약속을 어기고 나와 한번 해보자는 얘기 아닙니까?

아유 그래도 저도 사장님과 정리가 남아 있는 데 일부러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세 곳을 점포 후보지로 추천해 드렸는데 그 분이 꼭 그 자리를 고집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자식이 지금 나하고 장난하나.신 부장이라는 작자는 내 얼굴도 못 쳐다보고 혼자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신 부장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사람 좋게 보이지만 뒤에서는 온갖 술수와 잔 머리를 굴리는 친구로 연기의 대가였다.

아니 정말 점주를 위해 홍대 앞에 가게를 내줄 바에는 전철 역 주변으로 얻어줘야지 성공할 것 아니요. 그래 얻어 준다는 곳이 겨우 거기란 말이요.

그 자리는 유동 인구는 많아 보이지만 사람이 흘러가는 자리라서 별로 좋지 못한 자리인 거 몰라요? 결국 나하고 나눠 먹기밖에 더 되겠냔 말이오?

그 곳의 예비 점주는 30대 후반의 전부 주부이고 남편은 건축 관련 일을 한다고 했다.

그 아줌아 완전히 속았구만.

어이가 없었지만 그들이 내게 싸움을 걸어왔으니 맞서 싸우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놈들과 결별할 때 약속 사항을 문서로 남겨두는 건데. 그때 나는 오늘과 같은 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일이 생기면 서로 죽자는 얘긴 데 그런 바보 같은 놈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1%도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일이 현실이 되어 내 눈앞에 생기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스티브 코헨이 쓴 <협상의 법칙>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말로 한 약속은 그것을 쓴 종이만큼의 가치도 없다.라는

그 일이 있기 전에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약속 사항을 문서로 남겨두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인간은 일을 통해 배워간다.

 

4월말 내게는 우울한 소식이 하나 더 날아왔다. 정문 앞 맥도날드 옆에 미국 수입 아이스크림인 TCBY가 5월 초에 오픈 하겠단다.

이거 세상이 `완전히 돌았구만.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아이스크림 가게가 남들

보기에는 깨끗하고 재고도 없고 손쉬워 보이는 장점도 있지만, 단가도 낮고 성수기와 비수기,날씨에 따라 매출의 널뛰기가 아주 심한 단점이 있어 똑같은 돈을 벌어도 타 업종에

비해 스트레스가 많다. 두 사람이 1년에 똑같이 2,400만원을 버는데 한 사람은 매월 200만원 을 벌고 또 한 사람은 이번 달은 400만원 그 다음 달은 100만원 적자인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어느 쪽이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이스크림이 아직 디저트의 개념이기 때문에 기호 식품이라 시장이 아주 작다. 그런데 2억원이 넘는 투자비에 월세도250만원이 넘을 곳에 가게를 내서 돈을 벌자면 도대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아이스크림을 팔아야 되겠는가? 홍대 앞에만 현재 5개가 있는 데 또 하나가 더 생긴다니..

적정 개수는 2개내지 3개란 말이다. 이 바보들아.

흐흐 너희들은 아직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그래 한번 같이 죽어보자!

난 브랜드 가치도 없고 기존 아이스크림과 차별성도 없는 TCBY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1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의 나는 도를 닦는 수도승과 같다는 생각을 수시로 해보곤 한다.

 

오늘은11월 5일로 수능을 하루 앞두고 있다. 어제부터 날씨가 좀 추워지더니 오늘은 아주 쌀쌀하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춥다고 얘기하는 듯하다.현재 시간

오후 4시 40분. 12시에 가게 문을 연지 어언 5시간이 다되어 가는데 지금까지 손님은

두 팀. 매출은 11,000원. 어제 오후에는 2,000원을 팔았다. 남들이 모두 벌거벗은 나를 쳐다보며 비웃는 것처럼 쪽 팔린다. 자존심도 상한다. 내년 2월까지 주중 오후에는 문을

닫고 밤에만 열다가 주말에만 오후와 밤 모두 문을 열까?

하지만 아직 그러기엔 아내가 학기 중이고 주변 모든 가게가 문을 열고 있는데 그건 힘들겠지. 올해 매출은 여러 악재로 인해 전년 대비 약 30% 가량 줄었다. 그것도 케잌을 시작해서 그렇지 그게 아니었다면 50% 정도밖에 안될 것이다. 시장이 양분되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순이익이 약 1,500만원 정도는 줄어들 것 같다.

맥도날드 아래의 TCBY는 처음 나의 예측대로 오래가지 못하고 여름이 지나고 나자 결국 에스프레소 전문점으로 바뀌었다.

적어도 1억 가까운 돈을 손해 봤겠지. 이 바보.

 

4) 자본 주의

 

올 3월 중순의 어느 오후에 건물 관리 소장이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들리는 소문으로는 소장 일을 하기 전에는 건설 관련 일을 했다는 40대 초반의 두꺼운 검은 색 안경을 낀 40대 초반의 사나이로 안경이 그렇지 않아도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더 두드러지게 했다.

저 사장님. 여기에 서명을 좀 부탁 드립니다.

갑작스런 방문과 말에 난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게 뭔데 갑자기 서명을 하라는 겁니까.

아 예. 사모님이 그 동안 미루어왔던 건물 개.보수를 4월부터 한다는 내용입니다.

벌써 옆 금은방과 일식 집,그리고 사무실 몇 곳은 서명을 했습니다.

소장이 사모님이라고 얘기하는 여자는 이 건물의 주인으로 4년 전 남편이 사망하자 부인과 3명의 자녀에게 건물 두 곳을 상속을 했는데, 법적으로는 10%의 지분밖에 갖고 있지 않았지만 실제적인 주인 노릇을 해오고 있었다. 내가 입주해 있는 건물은 약 30년 된 건물로 낡아서 개.보수를 한다는 얘기는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부터 있었지만 그 동안 구체적인 얘기는 전혀 없다가 불쑥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대학가 상권은 특성상 봄과 가을이 학기 중이라서 성수기임은 삼척 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인데 공사를 가을도 아니고 봄에 하겠단다. 5층 상가 건물은 지하 1층에서 2층까지는 상가로,나머지는 사무실로 임대 중이었다.

입주해 있는 모든 가게가 피해를 입겠지만 4~6월까지가 1년 중에 가장 성수기인 나는 가장 피해를 보게 될 것이었다. 지난 겨울에 근처의 몇몇 건물이 개.보수를 하는 것을 보았지만, 건물주들이 세입자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겨울을 택해 공사를 했었다.

그런데 이 건물주는 의견 수렴도 없이 일방적으로 하겠단다. 세입자들이 죽든 말든 자기는 임대료만 받아 먹으면 그만이란 얘기인 것이다.

이런 씨팔. 아무리 세입자가 약자라지만 부당한 일에 일치 단결하여 자신의 권리를 찾아도

시원찮을 판에 벌써 서명을 한 곳이 여 곳이나 있다니.

아니 다른 건물들은 겨울에 공사를 하는 데 왜 여기는 성수기인 봄에 하겠다는 겁니까?

그건 저도 사모님께 말씀을 드려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당장은 피해를 좀 보겠지만 건물이 깨끗해지면 사장님도 장사가 더 잘되지 않겠습니까?

누가 건물 깨끗하다고 손님이 더 온답니까? 또 그 동안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 주고요?

그나 저나 공사 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건물 외벽을 법랑 코팅으로 씌우고 내장까지 손을 보면 약 40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40일이나요.다른 곳은 길어도 한 달이면 끝이 나던데.

공사 기간중의 손해에 대해 임대료를 면제해 준다거나 삭감해 주기는 하는 겁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건 완전히 그냥 죽으라는 것보다 더 하네요?

그러면 사장님은 서명을 못하시겠단 말씀입니까? 못하겠으면 가게를 2달 안에 내 놓으라고 사모님이 얘기 하셨습니다. 뭐라고. 이건 숫제 협박이다.

일단 생각 좀 해볼 테니 내일 봅시다.

 

그렇지 않아도 동일 업종이 같은 라인에 생겨 매출이 30%가량 줄었는데 공사로 성수기를

다 날려 버리게 되었으니 설상가상이었다. 이 놈의 나라는 어찌 되었는지 가진 자와 힘있는

자에게 법과 제도가 유리하게 되어 있어, 이런 상황에서도 약자인 나는 당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주택은 임대차 보호법이 있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상가는 없기 때문에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고, 가게를 옮기자니 세입자는 이미 보증금 외에 시설과 인테리어에 작게는 수천에서 수억까지 투자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가게를 옮기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어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는 것이다. 세입자의 이런 약점을 이용해 건물주는 자기 마음대로

하곤 하는 것이다. 자기 말이 곧 법인 것이다. 상가 임대차 보호법이 수년 전에 제정되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데 나은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대부분의 국회 의원들이 건물 한 두 곳 정도는 갖고 있는 데 누가 자기 목에 방울을 달 수 있겠는가?

 

같은 건물의 상가 세입자중 나와 조금이라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1층 비디오 가게 사장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40대 이상으로 이미 약자로 길들여져 있어선지 이전에도 부당한 일이 있어도 아무런 자기 의사 표현도 없이 만사 OK였다.

싸워봐야 우리만 손해라면서. 그때마다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비디오 가게 주인은 나보다 1살 많은 사람으로 전직 은행원이었다. 가게에 들어서니 김

사장도 소장이 좀 전에 다녀갔다며 분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만 알고 있으라며 건물주의 셋째 아들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그는 이 건물에서 70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건물주의5층 건물의 5층에 살고 있었는데 흔히 말하는 임대료로 먹고 사는 백수였다. 그런데 이 친구가 바로 비디오 사장과 같은 학교의 경영 학과를 졸업했는데 자기와는 별 친분은 없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체육 특기자로 입학해서 자기 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 그랬구나!

그 할머니가 바로 우리가 TV에서 흔히 보아온 돈으로 자식 대학 보낸 인간중의 한 사람이었구나. 대학 졸업장을 갖고 또 돈으로 적당한 신부감을 택해 결혼 시켰을 것이고, 한 달에

두 건물에서 수천 만원의 임대료가 나오는 데 일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돈이면 다 되는 우리나라 대한 민국은 참 좋은 나라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인 3뭘 말에 간판을 철거 했는데 가게에 간판이 없으니 밤에 사람

얼굴에 눈이 없는 것처럼 가관이었다. 건물 외부에 구조물인 지지대까지 설치하고 나니

가게 전면까지 모두 가리게 되었고 사람들이 건물을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손님은 장사를 하지 않은 줄로 알았다고 했다. 난 무엇보다도 손님들에게 죄송했다.

지지대를 설치하고 한 달이 지나도 실제 공사를 시작하지 않기에 소장한테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하나하나 치수를 재어 주문 제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늦어지고 있단다. 간판을 전체 업소가 규격화 한다고 해서 새로 제작해 달았는데 이게 또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비용도 업주가 부담하고 크기도 기존의 절반 가량으로 줄어든 대다가 우리나라 어느 곳에도 없는

1층과 2층 간판을 1층 가게 위에 함께 달란다.

그 모양이 어찌나 웃기든지 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공사는 결국 두 달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 동안의 물질적 피해는 500만원 이상이 될 것이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무한대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9월말에는 내년부터 현재 관리비를 제외하고 98만원인 임대료를 120만원으로 25%

인상하겠단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내려도 시원치 않은 판에 5%,10%도 아니고 25%나.

기가 막힐 노릇이다.

 

돈의 위력은 가게 잔금을 치를 때부터 나는 실감했다. 계약할 때부터 건물 관리 소장이

건물주 대리인으로 계약했는데 난 그때는 그런가 했다. 잔금 치를 때에는 건물주가 나오겠지 생각하고 첫 대면이라서 예의를 갖추느라 나는 정장을 입고 갔는데 건물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도 아니고 그래도 1층 전면에 있는 가게를 계약하는데..

그때 나는 생각했다. 건물주들이 이렇게 건물을 관리하는구나. 누가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은 그들에겐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냥 누가 되었던지 간에 임대료만 제대로 받으면 되는 것이다. 계약 때에 소장은 사업자 등록을 하기 전에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가짜 임대차 계약서를 만들어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서 였다. 건물 개.보수 같은 민감한 사안도 관리 소장을 내세워 통보만 하면 되고 참 편리한 시스템인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자식들이 큰 사고만 안치면 건물 하나 갖고 있으면 삼대가 편히 먹고 산다고..

 

자본 주의가 무엇일까? 돈이 최고인 세상. 천박한 천민 자본 주의가 판치는 우리 나라.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이런 면만 부각되어 도처에 만연되어 있을까?

모든 사물에는 명암이 있듯이 자본의 어두운 면만 부각된 우리 사회가 밝은 면도 많이 부각이 된다면 균형을 이룰 수가 있겠지.

 

4. 현재

 

처음엔 11월 들어 시간이 남아돌아 무얼 할까 하다가 전에는 좀처럼 읽지 않던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 책 읽기와 직장 생활 이후 약 7년 간의 내 삶을 돌아다 볼 필요성을 느껴서 소설을 쓰려고 마음 먹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글을 쓴다는 것이 어려움을 알았다. 용두 사미라고..

결국엔 소설이 아닌 일기가 되고야 말았다.

위의 얘기는 95% 이상이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 친구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이 글을 보내고자 한다. 정크 메일이 아닌 내가 살아온 삶을 통해 나를 좀더 이해하고 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딱 한가지 배운 것이 있다. 회사와 고객의 요구(needs))

사이에는 항상 차이가 있게 마련인 데 이 둘을 어떻게 조화롭게 만족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접점이 어디일까를 항상 생각했다.

 

퇴직 후 좋지 않은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말겠다는 오기와 독기로 가게를 시작해서 1년 동안은 추석과 설 3일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고객에게 서비스 한다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고 최선을 다했다.

3년 전에 가게를 시작했을 때에 손님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아저씨가 사장님 이세요?라는 물음이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들은 사장치고는 내가 너무 젊다고 생각했는지 놀랐었고,그들은 내가 집이 부유해서 부모가 가게를 차려준 것으로 알았다. 실은 순전히 나의 힘으로 시작한 것인데..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또래의 친구들처럼 버는 대로 쓰고 살았다면, 나도 부당한 일을 당해도 비굴하게 남아 있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게를 1년 하고 나자 직장 생활

4년보다 사업을 1년 하면서 느끼고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샐러리맨과 자영업을 하는 사람은 완전히 틀린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반쪽들인 셈이다.

지난 3년 동안 체인점을 하면서 그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통해서, 못된 건물주를 만나 겪은수많은 부당한 일들,외부 환경 변화로 인한 사업의 어려움 등을 통해 나는 남들이 10년 동안에 배울 것들을 모두 배웠다고 생각한다. 이것만 해도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재산을 가진 셈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최근에 여러 부동산에서 가게를 팔지 않겠느냐고 했다. 현재로서는 일 업종에 넘길 수는 없기 때문에 손해가 크다. 하지만 일산으로 옮겨 동일 업종을 한다면 손해는 없다. 가게를 싸게 얻어서 시설비를 감안하더라도 투자 금액은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최소한 투자한 금액 정도는 받을 수 있을 테니까…

6년 전에 2,800만원으로 시작한 후, 나는 현재 약 2억 5천만원의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1년에 약 1.5배씩 자산을 늘려왔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지만 나의 나이를 감안하면 적은 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의 나의 목표는 40세 이전에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수 있는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 여러 악재를 경험하면서 세상 일은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물론 지금처럼 한다면 그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하고 남들을 이기기 이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 스트레스는 더 많아질 것이고 나의 정신은 보다 더 삭막해져 갈 것이다.

가게를 팔고 아파트를 담보로 해서 대출을 받으면 나도 임대가 아닌 조그만 가게 정도는 살 수 있을 것이고, 그 임대료와 아내의 월급을 합치면 생활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도 있겠지.

 

나는 우리 나라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수십 년간의 군사 독재 체제 길들여진 평균 주의라고 생각한다. 나와 남은 다를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말이다. 이는 특히 동일 집단에서 두드러진다.

구성원이 잘되면 축하해 주어야 할 텐데, 쟤는 나보다 못한 것 같은데 왜 더 잘되었지 하고..

 

나는 인생이란 계속 다가오는 여러 문제들을 풀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난 앞으로도 내게 닥쳐올 문제들을 해결해가며 살아가고자 한다.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1년 후의 나의 모습은 모른다.

지난 7년 간 나의 인생이 미래를 위해 살아왔다면,앞으로의 나의 인생은 현재를 위해 살아가고자 한다.

이 메일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젊음에 대한 얘기를 답장으로 보내 준다면 난 그에게 아주 감사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 20000.

 

< 2 부 >

 

1. 가게 정리

2. 내돈 돌리도!

3. Now

 

2탄은 1부 이후 약 2개월(12/01 ~ 1/02)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짧은 기간에 개인적으로 많은 일과 변화가 있었다

 

 

두 개의 화일을 붙여넣기 하는 중에 두번째 화일이 잘렸군요.

네티즌 여러분께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처음이니 용서해 주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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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

 

1. 가게 정리

2. 내돈 돌리도!

3. Now

 

2탄은 1부 이후 약 2개월(12/01 ~ 1/02)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짧은 기간에 개인적으로 많은 일과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

싶었다.

 

1.가게정리

 

가게를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나의 입장에서는 가게를 그대로 인수할 사람에게 파는 것이 가장 이익이 되는 일이기에 일단 본사에 연락을 했다.

김사장님. 홍대점입니다.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 예. 사장님은 요즘 좀 어떠세요?

저야 뭐 여전하죠. 한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어 전화를 드렸는데. 제가 가게를 정리하고

집이 있는 일산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사장님이 좀 도와주셔야 겠습니다.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뭘 도와 드릴까요?

홍대나 신촌쪽의 창업 희망자가 있으면 저희 가게를 소개 좀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본부장한테 얘기해 놓죠.

며칠 후 본사 영업 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2달 안에 책임지고 팔아준다고 큰소리를 쳤다. 물론 본사 입장에서야 내가 일산으로 가게를 올기게 되면 홍대점을 새로 오픈 할 수 있으니까 돈을 벌 수 있어 좋고 일산점도 새로 생기니까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가게는 주택과 틀려 임자가 나타나야 거래가 성사되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사장님. 이쪽은 박정훈씨입니다.

저는 노용환이라고 합니다.

다음주 월요일 본사 박 부장은 가게를 보러 왔다며 한 30가량 되어보이는 젊은 남자를 데리고 왔다. 예전부터 몇 곳을 보여주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까다롭게 군다는 그는 나와 인사만 한 후 혼자서 이곳 저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는 박 부장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지만 시험친 후 점수 발표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별로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살려는 사람은 싸게 사려 하고 팔려는 사람은 비싸게 팔려고 하고.

박 부장은 그를 배웅하고 다시 가게로 돌아와서 마음에 들어 한다고 귀뜸을 해주고 갔다.

그날 밤에 그가 친구를 데리고 가게에 다시 나타났는데 인사도 없이 뒤쪽 자리에 30분가량 비밀 얘기를 하고 돌아갔다. 카운트에 있던 나는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본사 박 부장에게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저 본사 박 부장입니다.

아 예.

저 박정훈 그 친구가 가게를 계약하겠다는 데요.

뭐라구요? 나는 기쁜 한편으로, 한번에 해결이 되니 약간은 허탈했다.

계약은 내일 하자고 하니까 준비 좀 해주십시오.

 

다음 날 11월 17일 오후 1시에 나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가 있었다. 그 친구가 인테리어와 장비는 새로 한다고 하여, 총 금액 1억 2천(보증금 3천,권리금 9천)중에 계약금조로 5백만원을 수령했다. 장비와 인테리어까지 승계했다면 1억 5천 정도는 받을 수 있었겠지만, 인테리어가 내가 시작할 때와는 많이 달라져서 이정도 금액에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월드컵을 앞두고 홍대 앞이 미관 지구로 지정이 되어 가게 건너편의 약 200여 미터에 달하는 무허가 건물(흔히 홍대 먹자 골목으로 불리는 곳)이 일주일 전에 헐린 것도 매각에 일조를 했다. 대차 대조표를 따진다면 가게 시작할 때 총 투자금이 약 1억이었으니(보증금 3천,권리금 2,300만원,시설비 4,700만원), 가격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잔금은 11월 말로 모든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막상 생각보다 훨씬 쉽게 가게를 정리하고 나자 마음이 뒤숭숭했다. 우여곡절이 남달랐기 때문에 지난 2년 6개월간의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지기도 했고, 내가 시작한 첫 사업이었기 때문에 애착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1월 28일 가게에 도착하니 유리에 연락을 달라는 관리 소장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가하고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만나서 얘기 하잔다. 나는 건물 6층에 있는

관리 사무실로 바로 올라갔다.

소장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저도 사장님께 이런 말씀 드리기가 참 뭐한데요. 사모님이 임대료를 인상한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인가.

얼마나요

150만원이요.

아니 뭐라고요?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내가 이렇게 놀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원래 월 임대료는 98만원이었는데 건물 개보수를 했다고 2002년부터 30%가량 인상해서 120만원으로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와서 새 임차인에게는 처음부터 120만으로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에 가게 계약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갑자기 잔금 2일전에 다시 25%나 인상을 하겠단다.

주변 무허가 건물이 헐리면서 건물 매매가가 올랐고, 자기 건물의 임대료가 주변 건물보다 싸서 올리겠답니다. 사장님이 계속 하시면 120만원으로 해 드리지만 새로운 사람이 와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올린답니다.

아니 사람이 바뀐다고 임대료를 올리겠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저도 이런 일 때문에 힘들어 죽겠습니다. 저쪽 건물 2층 술집의 경우에도 사장님과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임대료 인상분 1년 치를 주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알았습니다. 생각 좀 해보고 연락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가게로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걸 어떻게 한다. 이 사실을 신 임차인에게 알리면 건물주에 대한 불신으로 계약을 파기하자고 할 테고, 들어주자니 보증금 3천만

원 중 360만원이 하늘로 날아갈 판이었다. 이 여자가 끝까지 내 발목을 잡는구나.

내 머리는 터질 것만 같았고, 분노는 식을 줄을 몰랐다.

 

대망의 11월 30일.

잔금을 받고 관리 소장으로부터 360만을 강탈당하고 보증금을 정산을 했지만 뒤끝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여보 나야. 드디어 끝났어

여보 수고했어요

나는 아내와 통화를 한 뒤 가게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오후 3시에 본사 직원이 장비를 가져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전에 정리 정돈은 물론 집에 가져갈 물건은 따로 챙겨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2. 내 돈 돌리도!

 

어머니! 저 왔습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왔구나. 해람이도 오느라 힘들었지?

아니예요

 

언제나 그렇듯 부모님은 따스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가게를 정리한 후 그 동안 명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 뵙지 못한 부모님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나는 둘째 가람이도 볼 겸 해람이와 먼저 주중에 함양으로 내려왔고 아내는 토요일날 수업을 마치고 내려 오기로 했다.

 

토요일 저녁에 아내가 도착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가족의 오붓한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때 시샘이나 하듯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저 노 사장님 이세요?

그런데요. 누구시죠? 나는 짐짓 모른척했다.

저 노 사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사모님에게 내용 증명을 보내셨다면서요.

사장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시겠지만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나는 당사자가 아닌 허수아비와 같은 관리 소장과 길게 얘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저는 소장님하고는 아무런 감정도 없고 할 얘기도 없으니 할 얘기가 있으면 본인이 직접

전화하라고 아십시오?

그렇다고 이렇게 전화를 끊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모님과 협상을 하시죠?

나는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전하세요.

통화 후 나는 부모님에게 그 동안의 자초지종에 대해 설명했다.

부모님은 잘했다고 하셨다. 사실 가게를 정리한 후 강도질 당한 것과 다름없는 임대료 인상분 360만원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동안 당한 것도 억울한데…

소송을 걸면 소액에다가 판결이 나기까지 1~2년이 걸리니 그것도 안되고. 그래! 그 인간의

약점을 한번 건드려 보자. 안되더라도 감정적인 분풀이는 충분할 것이었다.

그래서 내려오기 전에 내용 증명을 다음과 같이 보내었었다.

 

최문자,양윤정씨 안녕하세요?

저는 승문 빌딩 107호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던 노용환 이라고 합니다.

지난 2년 7개월간 건물주 잘 만나서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인생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핵심만 얘기하자면 11월 27일 날 강도질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360만원을 12월

10일까지 다음 계좌로 입금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신한 은행 : 329-12-XXXXXX, 예금주 : 노용환

왜냐하면 원래 107호의 임대료는 98만원인데 2001년 1월부터 120만원으로

23% 인상한다고 하여 저 다음에 들어올 세입자에게 그 금액대로 가게를

양도하게 되어서 일주일 전에 소장을 통해 이를 통보해 주었는데 갑자기 건물주와 본 계약 체결

2일전에 세입자가 바뀌니 다시 25%를 인상하겠다고 하여,

약자인 저로서는 취소를 하면 계약이 파기되어 2배의 위약금을 물 수 밖에 없어

할 수 없이 추가 인상분 30만원의 1년 치 360만원을 보증금에서 공제한 후

계약을 진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변에 알아보면 알겠지만 IMF 때보다 더 어렵다는 요즘 같은 불경기에 5~10%도 아니고

23% 씩이나 임대료를 올린다는 것도 상식을 벗어나는 일인데, 하물며 거기에 25% 를 추가로

인상하여 총 50%이상을 한꺼번에 올린다니…

이는 가게를 옮기려는 약자인 세입자의 약점을 이용해 돈을 챙기려는 얄팍한 수작임은

삼척 동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최문자씨 소유의 다른 건물에서도 동일 수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번 일이 계획적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주변 건물주들에게 한번 알아 보세요. 요즘 임대료를 인상하겠다는 건물주가 있나.

그것도 50%이상을 올린다고 하면 아마 농담을 하는 것으로 알 것입니다.

 

날짜를 엄수하지 않을 시는 당신이 탈세한 세금 추징을 위해 세무서에 관련 자료를 첨부하여

고발할 것이고, 그래도 세무서의 대응이 미진할 시에는 검찰에 당신과 같은 악덕 건물주를

고발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1) 탈세

보통 타 건물주들도 당신들처럼 세금 포탈을 하지만 임대료를 1/2또는 1/3정도로 줄여 신고를

하는데,당신들은 1/5로 줄여 신고를 하니 107호 한곳만 해도 1년에 수십에서 수백 만원 탈세를

하여 그 금액이 전체 건물은 수천만원에 이를 것이고, 건물이 두 곳이니 탈세 금액이 얼마인지는

당신들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 건물 개보수

타 건물들은 대학가의 특성을 감안해 가장 비수기인 지난 겨울에 여러 곳이 개보수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모든 가게들이 가장 성수기인 4월 달에 유일하게 공사를 시작해 영업에 피해를 주고

(나의 경우만도500만원 이상 손실을 보았음), 설치한지 얼마되지도 않은 간판을 철거하는 것도

억울한데 새로 제작한 간판 비용도 세입자가 부담하라니 그 배짱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모든 가게의 손실액을 전부 합하면 수천 만원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싫으면 나가라고 협박을 하니 당신 말이 곧 법이나 다름 없더군요.

한달 이면 끝난다는 공사는 2달이 다 되어서 끝났는데도,사과하나 없고…

당신은 공사비도 비용에 넣어 공제를 받을 것이고,수리비는 임대료 인상해서 충당하면 남을 것이고..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 하지만 당신들의 위와 같은 무법 천지도 이번에 '상가 임대차 보호법'이 통과되면 마음대로 안될

것입니다. 소식은 들으셨나요? 아마 가장 속이 뜨끔 하겠죠?

임대 기간은 5년이고 그동안 임대료 인상도 못하게 되고,인상도 일정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고...

 

위의 내용 증명에 대한 반응이 온 것은 일단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나 다름 없었다.둘째 가람이는 아내가 방학을 하는 12월말에 데려올 예정이었지만 내가 돌보겠다고 우겨함께 데리고 왔다. 12월 10일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자 나는 관련 자료를 일단 세무서에 보낼 준비를 해두었다.그런데 다음날 관리 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사모님이 돈을 송금해 주겠으니 관련 자료들을 좀보내달라고 했단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하하. 이렇게 통쾌할 수가. 구린게 많은 인간은할 수 없구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이렇게 기분 좋은 날은 내 생애 다시 없을 것 같았다.나는 만일을 대비해 관련 자료를 복사해 두고 자료를 넘겨주었다.다음 날 우리 가족은 이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횟집으로 오랜만에 외식을 갔다.3. Now 가게를 정리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연초에 집을 사면서 대출 받았던 대출금 2,500만원을 갚은것이었다. 이자가 나가니 빨리 갚는 게 상책이었다. 남은 돈은 대략 1억 정도였는데 막상 일산쪽에 가게를 알아보니 1층 10평 기준으로 역세권은 보증금과 권리금으로 1~1.5억이 들고월세도 200만원 이상 하였다. 아파트 값은 분당과 일산이 20% 이상 차이가 나는데 가게는비슷하였다. 나는 이는 거품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그게 시세로 형성되어 있어 도리가 없었다.나는 아이스크림 전문점의 단가로는 월세 200만원을 감당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자금으로는 무엇을 하든 다시 대출을 받아야될 형편이었다. 물론 3년 전의 상황과는 내용적으로는 분명 다르긴 했지만 형식은 비슷했다.무엇이든 시작하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되어 있는데 좀더 신중해야 했다.내가 관심을 갖고 있고 잘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일단 가게는 가족들과 Life Cycle을 맞출 수가 없기 때문에 포기하기로 했다.내가 택한 대안은 올해 공인 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해 부동산 쪽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이유는 간단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가 있고,내가 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분야이고무엇이 부족한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남은 1억원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했는데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있었다.(나는 지금까지 주식 투자는 하지 않고 있다. 모르기도 하지만 우리 나라는 주식 시장이투자가 아닌 투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하나는 전세낀 아파트를 사두는 방법과 조그만 상가를 사두는 방법이었다. 아파트 투자는 수요와공급 불균형과 부동산 경기 활성화로 인해 작년과 같은 폭등은 없겠지만 올해 경기가 회복되면중대형 위주의 수요가 늘어날 것이고 수익율도 10%는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중대형 아파트를사려니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되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되겠지만 과거에 그랬듯이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결국 소액으로 투자 가능하고 임대 수입도 있는 상가를 알아보기로 했다.처음에는 일산쪽에 알아보았지만 이미 상가도 연초에 비해 많이 올라 있었고 그나마 마음에 드는 곳도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부동산 신문을 통해 용인 수지 2지구의 단지내 상가가 매물로 나온 것을 보았는데 수익성이 아주 좋아 보였다.(연 15%) 현재 부동산 자리였는데 사전 답사로 약속 전날에 사전답사를 위해 수지로 갔다. 신혼 때 2년 정도 살았던 수지는 많이 변해 있었고 계속 아파트 공사로 바빴다.나는 부동산 한곳을 방문해 단지내 상가의 시세와 입지등의 비교를 위해 몇 곳을 들러 보았다. 다음 날 약속 시간에 부동산에 도착하니 50 정도 되어 보이는 사장이라는 복부인 같은 여자를 만났는데신문의 내용과는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신문에는 매매가 2.2억에 현 보증금 5000만원에 월 200에 임대중)이었는데, 자기 가게 세 만기가1월인데 현 주변 시세보다 임대료가 비싸니 내릴 예정이란다. 그래서 얼마냐고 물으니 보증금을 5천에서3천으로 내릴 예정이란다. 나는 시세를 알아보아서 터무니 없는 가격이라는 생각은 안했지만 세입자마음대로 가격을 내리겠다는 데에는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경우와 비교해볼 때.내가 가게를 인수해서 요구를 들어주면 당신은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중개 수수료를안 받겠단다. 자기는 2천만원 벌고 나는 200만원 주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금액을 대신 깍아 달라고 했다. 그 여자는 이 가격도 원래 2.35억이었는데 급전이 필요해서주인이 내린 거란다. 결국 나는 5백을 깍아 계약하기로 했다. 세입자와 계약 기간은 1년이니 내가대폭 인하해준 금액은 그때가서 조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금액이 시세보다 10%이상 저렴하지 않았으면 계약할 리도 만무했겠지만. 수익율도 12%로 괜찮았고.12월 29일 계약하고 1월 14일 잔금을 치르고 모든 일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대금은 아파트를 담보로 8천 7백만원을 대출 받아 해결했다. 그 동안 친가와 처가는 물론 처음으로 부산에 살고 있는 여동생 집도 다녀왔다.그리고 정말 마음 편히 설악산으로 가족 여행도 다녀왔다.여러 어려움이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가게를 정리한 후 새옹지마란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었다.

 

PS) 가게 정리후 읽은 책들

<창업 귀신이 되지 않으면 성공은 없다> 박경환, 중앙경제평론사

<한국 시장의 프랜차이즈 전략> 유재은, 한국생산성본부

<성공하는 장사목 실패하는 장사목> 김광희, 미래와경영

<합법적으로 세금 안 내는 110가지 방법> 노병윤, 아라크네

<관계우선의 법칙> 빌 비숍, 경영정신

<정운영의 중국 경제 산책> 생각의 나무

<나이듦에 대하여> 박혜란, 웅진

<프로페셔널의 조건> 피터 드러커, 청림출판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갔니?>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