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과 통합에 능한 겸손한 리더

                  - 에이브러햄 링컨 -



9개월간의 초등학교 생활, 잡화점 경영 파산, 빚을 갚는 데만 17년,

주의회 의원 선거 낙선, 상원의원 선거 낙선, 부통령 선거 낙선한 남자가 있다.

실패와 불행이라는 단어가 늘 따라다녔던 그를 미국인들은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는다.



바로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

그는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미국에서 최초의 대통령이 탄생한 지 200주년 되는 1989년

미국의 가장 위대한 인물을 조사했을 때도 종합 1위는 링컨이 차지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노예를 해방시킨 인물이자

민주주의를 웅변한 연설가인 동시에 위기상황에서도 빛나는 유머를 구사한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다.



링컨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리더십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이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고,

남북전쟁으로 사나워진 민심을 화합하는 데 성공했으며,

올바른 인격과 성품, 유머를 겸비한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이 탁월한 지도자다.

권위적인 대통령이길 거부했으며 개방적인 마인드로 리더십을 펼쳤다.



켄터키 지방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9살이 되던 해 어머니의 유언을 받는다.

"부자나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되라" 는 유언을 마음에 새겼고,

새어머니 역시 가난한 가정환경에서도 독서를 통해 지식을 얻도록 교육했다.

정규교육을 받은 것이라곤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우체국장, 뱃사공, 가게 점원, 토지 측량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가며 생계를 마련했다.

그러나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링컨은 독학으로 공부해 27살이 되던 해 변호사 자격에 합격했고,

일리노이주 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정치계에 입문한다.

링컨의 정치활동을 보면 그의 성품이나 철학 등 어떤 리더십을 펼쳐왔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뚜렷한 목적 제시로 전쟁 수행

그의 가장 큰 정치 화두는 '노예제도'였다.

노예 반대 노선을 제창하면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해 본격적으로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S.A.더글러스는 노련한 정치가로 링컨이 제시한 노예제도를 놓고 지역을 순회하면서 치열한 토론을 전개했다.

이 선거에서 링컨은 패배했지만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링컨의 명성은 유명세를 탔고,

1860년 공화당의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았다.

노예제도에 대한 견해가 온건했기 때문이다.

노예제도 폐지 주장으로 링컨도 예상치 못한 남북전쟁이 터졌다.

여기서 링컨의 강한 단행력을 갖춘 리더십이 발휘된다.

남부의 많은 주들이 잇달아 합중국을 이탈하고 남부연합국을 결성하면서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링컨은 무력대항을 피할 수 없게 되자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전쟁의 목적은 분명했다.

남부는 자신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고 북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과 독립을 얻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인 반면,

북부는 노예제 근절이 아닌 자유정부를 파괴할 권한이 없다는 점을 내세웠다.

물론 이런 목적을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깊은 인내와 능력, 기술이 필요했다.

링컨은 "남부가 연방파괴를 위해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미합중국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며,

국민의 정부, 국민에 의한 정부인 입헌공화국, 즉 민주주의 국가가 영토를 보존할 권리를 가졌느냐 가지지 못했느냐의 문제다.

우리는 파괴를 목적으로 사용되는 힘에는 자유를 보존하기 위한 힘으로 대항해야 한다" 고 강력대응을 호소했다.

이렇게 대응한 링컨은 여러 세력을 조정해 남북의 경계에 있는 주들을 연맹으로 끌어들여 노예 해방을 점진적으로 단행했다.

초기에는  북군이 불리했으나 점차 남군이 수세로 몰린 틈을 나 노예제 폐지를 추진,

분명한 목적과 나아가야 할 방향 제시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포용과 책임의 리더십

링컨은 조직 내부에서 코드 인사와는 전혀 무관한 대통령이었다.

일하기 좋아하는 측근들로 인사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벌들로 국정을 이끌어간 것이다.

코드가 맞지 않지만 가장 유능하고 뛰어난 팀을 만들고 그들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과의 경선에서 패배한 경쟁자들에 대해

"우리는 당 내에 가장 강력한 사람들이 각료로 필요합니다. 그들은 당 내에서 매우 강력한 사람들이며,

나는 이 나라에 대한 그들의 봉사활동을 박탈할 권리가 없습니다" 라며 라이벌 팀과 조화를 이뤘다.

내각을 맡겼지만 여전히 링컨을 맹렬히 비난했던 시워드는 해임시킬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링컨은 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명확히 말하되 사적으로 시워드와 대화를 나눴다.

시워드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다.

"대통령의 도량이 커 가히 초인간적이다. 대통령이 우리들 중 최고선이다."

이렇게 라이벌을 포용하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전과 목표에 대한 확고한 결심과 확도부동함이 첫번째라 할 수 있다.

결심과 의도, 목표가 확실하다면 사소한 경쟁을 극복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또 적절한 타이밍과 뛰어난 감각, 여론에 귀기울이는 자세다.

여론과 정반대방향으로 나갔다면 지금의 미국, 자유의 새로운 탄생은 없었을 것이다.

셋째, 상대방을 얕보거나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섬기는 적군을 아군으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이 발휘됐다.



링컨은 겸손함과 정직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자신과 경합을 벌여 승리한 판사에게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격려의 말과 함께 동역자가 돼주겠다는 진심 어린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남북전쟁 당시 자신의 재선 가능성이 불투명하다고 판단, 밀봉된 편지를 국무위원들에게 맡겨뒀다.

그러나 예상 외로 링컨이 재선에 성공했고, 그 봉투 안에 적힌 내용은 재선 3일 후 공개됐다.

내용인즉, 자신이 재선되지 않더라고 취임기간의 혼란을 막고자 당선자와 협력해 미연방을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약속이 담긴 편지였다.

나라의 위기를 막기 위한 링컨의 배려이자 가장 낮은 자스이 신분으로 겸손함의 미덕을 보여준 것이다.

또 게티즈버그 전투시 미드 장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며 짧은 편지 한 통을 썼다.

"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실패로 돌아가면 이 편지를 모두에게 공개하시오."

자신이 책임을 지되 모든 공로와 영광은 부하에게 돌리는 뛰어난 인품에 미국, 아니 전 세계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후보시절부터 기른 구레나룻은 미 역사상 대통령으로는 처음이었으니 새 시대를 창조하겠다는 새롭고 강한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링컨은 젊은 시절, 삐적 마른 외모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너무 큰 키와 큰코, 주걱턱으로 사람들의 놀림감이 됐다.

그러나 '나이가 40을 넘은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했듯이

그는 인재등용에서도 단순히 재능의 뛰어남만 보지 않았다.

성경 한 구절도 안 읽어본 사람처럼 덕이 보이지 않는다며 인사를 물린 일은 유명한 일화다.

볼품없는 외모였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오며 인자함과 위엄을 갖춘 모습의 링컨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담고 싶어하는 얼굴이 됐다.